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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e] 그리하여 강물은 시작되고 본문

FATE

[Fate] 그리하여 강물은 시작되고

메이포플러 2019.05.19 19:30

190519 로빈 후드 드림



* BGM


* 이입드림. 드림주 이름 X

* 로빈 후드 생전 배경

최///승///자 시인의 시///작 읽어보세요 짱


* 초원, 바람, 바다, , 구릉, 파도, 꽃향기


 

 

 

이것 봐요, 바람이 정말 기분 좋아요.

천이 펄럭인다. 물비늘처럼 빛나는 흰 천이. 남자는 거칠게 흔들리는 면의 모서리를 응시한다. 바람이 우수수 불자 날개달린 것들의 날개처럼 흔들리던 천이 붕 떠오른다. 기어이 멀고 먼 곳으로 날아가버린다.

남자는 흰 꽁무늬를 응시하던 시선을 거두어 여자를 바라본다. 눈이 마주친 여자는 뭐가 웃긴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돌린다. 그녀의 등허리에서 흔들리는 머리칼. 검은 파도처럼 출렁이는 긴 머리칼.

바람이 어디에선가 꽃향기를 몰고온다. 초원에 부는 바닷바람에서는 꽃냄새가 난다.

 

그리하여 강물은 시작되고

 

꽃향기가 폭우처럼 쏟아진다. 남자는 바람이 실어옮긴 향이 구릉 아래의 수목원에서 비롯된 것이란 사실을 안다. 얼마 전 만개한 사과꽃이 바람과 능선을 타고 거슬러 올라온 모양이다.

여자가 꽃향기가 흐르는 초원을 기껍게 걷는다. 거의 폭풍우 전야처럼 억센 바람이 불어대는대도 여자의 낯은 말갛고 기꺼이 웃음을 터뜨린다. 오히려 거대한 자연과 마주하며 양팔을 좌우로 벌린다. 꿋꿋하게 선 여자의 등 뒤로 검은 머리칼과 흰 치맛자락이 사정없이 물결친다. 남자는 그 모습을 마냥 바라본다. 어딘가 먼 광경이다. 현실감이 옅은 여자는 오늘따라 한층 더 현실감이 없다.

난 바다 너머에서 왔어요.

과거의 여자가 말한다. 그 때에도 현실감은 옅었다. 단호하게 끊는 어미에서는 오래된 냄새가 났고, 그래서 남자는 순간 여자가 이 숲에 아주 오래 전에 와서, 아주 오랫동안 살았다고 착각했다. 여자는 꽃냄새와 풀냄새, 연기냄새와 햇빛냄새를 망토처럼 두르고선 그리 말한 것이다. 숲 밖으로는 나가본 적 없을 것처럼 굴면서 소금냄새가 나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바다를 건너 왔는걸요.

그래서 남자는 당황했고, 조금 겁먹었으며, 그 다음에는 단념한 늙은 기사마냥 고개를 주억거렸다. 바다 너머에서 온 이방인이 입 안의 혀처럼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몰라서였다. 그러나 거슬린다고 하여 혀를 잘라낼 수는 없었다.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상에, 바람이 엄청 기분 좋아!”

웃음소리에 남자는 지난 기억에서 눈을 돌린다. 초원 한가운데에 여자가 서있다. 풀잎이 수면처럼 출렁이고 머리칼이 검은색으로 물든 바람처럼 흩날린다. 여자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남자를 돌아본다.

왜 거기 있어요? 이리 와요.”

그 말을 들었을 때에야 남자는 나무 그늘 아래에 우두커니 선 자신을 자각한다. 햇빛 아래에 선 여자를 보는 데 정신이 팔려 어디에 서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다만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림자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뜬다. 구름을 가르고 내리는 햇살이, 혹은 옅은 데이지 빛깔의 치맛자락이, 어쩌면 말갛게 웃는 낯이 지나치게 선명하다. 눈부신 것을 볼 때 상처입지 않으려면 조심스럽게 바라봐야 한다.

너무 밝잖아.”

얼떨결에 굴러나오는 말은 진심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남자는 저도 모르게 뱉은 말에 당황해 입을 다문다. 진심이든 뭐든 하고싶은 말은 아니었다. 여자가 들었으면 하는 말도 아니었다.

당신은 너무 어두운 데에 있고요.”

남자는 내심 욕설을 지껄인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건 쉽다.

뭐어, 이 정도가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겠어요.”

어두운 데에만 있으면 눈 나빠져요. 어두운 데에서 밝은 걸 봐도 그렇고요.”

나처럼 뛰어난 궁수는 그럴 일 없으니 신경 안 써도 됩니다요. 밤이라 할지라도 저기 있는 나무에서 떨어지는 나뭇잎 정도는 맞출 자신이 있으니까.”

그러다 내 눈이 나빠지면 어떡해요?”

여자는 남자를 겁먹게 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

당신을 보려면 계속 어둠 속을 들여다봐야 하는데, 그러다 내가 아무것도 못 보게 되면요?”

그럴 일 없어요.”

숨을 생각 말아요, 찾으러 다닐 거니까. 내가 여기서 당신 따라다니는 거 말고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양털을 실패에 감는 거? 내가 못하니까 보다 못한 당신이 대신 해준 그거?”

내가 무슨 말을 해주길 바라는데요? 책임지고 수발이라도 들어주겠다는 말을 들어야 속이 편합니까?”

말보다는, 한발자국만 앞으로 디뎌봐요. 그러면 내가 알아서 할게요.”

남자는 발밑을 내려다본다. 그림자가 초원과 숲을 나누는 일선을 그린다. 물결처럼 흐르는 초원과 고요히 수런거리는 숲. 남자는, 있어야 할 곳은 지금 선 곳이라고 생각한다. 등에 진 책임과 품에 안은 바람을 위해서라도. 감당 못할 것에 손을 뻗었다가 모두 망쳐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무도 모르게 몸을 숨긴 채 웅크리고 있다가, 아무도 모르는 새에 사라져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어김없이 바람이 불어와 눈을 감는다. 이전 여자는 나뭇잎 이는 소리가 파도치는 소리와 비슷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때부터 남자는 바람이 불 때면 파도 소리를 듣는다. 바다를 본적도 없는 남자는 바다에서 나는 소리를 안다. 그 소리가 언제까지고 남자를 뒤따라 올 것도 안다. 여자가 바다를 몰고 왔다.

, 이것 봐요. 바람이 정말로 기분 좋다니까요.”

그건…… 나도 압니다요.”

그리고 여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종종 깊은 우물 같은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긴 하지만, 그래도 여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바람이 불면, 만발한 사과꽃 향기를 실은 바람이 밀어닥치면, 여자는 사정없이 흩날리는 머리칼을 그러모은다. 치마가 펄럭이다가도 다리에 휘감기고, 다시 팽팽하게 부풀어올라 여자의 발목과 마른 발등을 드러낸다. 몸이 휘청거릴 만큼 강한 바람이 불자 여자는 머리칼을 정리하는 것도 포기하고 웃는다.

이것 봐요. 날아갈 것 같아.”

검은 물결처럼 머리칼이 나부낀다. 남자는 생각한다. 밤에 보는 바다는 분명 이렇게 생겼겠지, 하고.

그래서 멀찍이 떨어져 바라만 보는 거야. 당신이 바다를 건너왔으니까. 모르던 걸 알게 했으니까. 몰라도 될 걸 알게 하니까. 밀어닥치고, 스며들고, 잠기게 해서, 왔을 때 처럼 어디론가 흘러갈 테니까. 당신이 바다를 몰고 왔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는 낮달처럼 웃는다. 웃음이 물거품처럼 터지는데, 바람이 쉼없이 밀려들고, 팽팽하게 부풀린 치맛자락을 돛으로 삼아, 그녀는 수면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지겠지. 떠나는 배를 향해서는 어떤 인사를 해야 하나. 남자는 그걸 아직 모른다. 떠나는 배를 향해서는 어떤 인사를 해야 하나…….

변덕스러운 봄바람은 여자의 치마를 잡아당기다가도 다리에 답싹 말리길 반복한다. 여자는 신경쓰지 않고 물이 오른 푸른 잔디 위를 자박자박 걷지만 걸음은 다소 위태롭다. 남자는 정신을 차리려고 혼잣말에 가까운 말을 건넨다. 그러다 넘어집니다요. 여자는 웃기만 하고 대답이 없다. 남자는 이게 한낮에 보는 꿈인가 한다. 그래서 이렇게 현실감이 없는가보다 하고 이유를 찾는다. 잔잔한 물에 돌을 던지듯 남자가 여자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면 그녀가 뒤를 돌아보고, 어김없이 바람이 밀어닥친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이 사과꽃 향기를 실어 나르니까 초원의 바닷바람에서는 꽃내음이 나는 거야.

.”

돛을 내린 배는 발이 묶인다. 닻을 내려도 멈추고, 바람이 멎어도 멈추고, 갈 곳을 잃어도 멈춘다. 여자는 어떨까. 옷자락이 다리에 얽힌 채 비틀거리던 여자가 비스듬히 기울어진다. 남자는 여자의 놀란 눈을 본다. 동그랗게 뜬, 우물 같은 눈을.

그녀가 순간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릴 것처럼 느껴진 건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깜짝이야.”

남자는 속으로 동의한다. 내 말이요. 아직 이를 악물고 있어서 입밖으로 나오진 않는다. 엉덩방아 찧은 등허리의 아픔보다는 힘껏 움켜쥔 손아귀의 얼얼함이 크다. 남자는 풀밭에 드러누운 채 하늘을 올려다본다. 여자가 팔 안에서 숨쉴 때마다 등이 오르락내리락한다. 평소보다 조금 빠른 호흡이 그녀가 놀랐음을 대변한다. 꼭 덫에 걸린 짐승 같다. 남자는 속으로 불평한다. 당신은 잡히지 않을 거잖수. 이건 불공평하다. 당신은 잡히지 않을 거야. 여자의 호흡이 느려진다. 멀리서 새소리가 들린다. 다시 바람이 분다. 나뭇잎이 거품처럼 부서지는 소리. 파도치는 소리. 남자가 모르는 바다가 밀려온다. 남자는 여자를 껴안는 팔에 힘을 준다. 당신은 잡히지 않을 거야. 끔찍하다. 이 순간의 이름이 평화가 아니라면 대체 무얼 평화라 부르나.

놀랐어요. 당신 정말 빠르네요.”

나도 놀랐수다.”

바람이 뛰어오는 줄 알았다니까요.”

반갑지만은 않은 칭찬이구만요.”

당신까지 넘어질 줄은 몰랐지만요. 내가 좀 무거웠나요?”

남자는 여자의 정수리를 곁눈질했다. 새카만 머리칼. 깊은 물 속을 닮은 머리칼. 남자는 여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혹은 여자가 조금만 들여다보게 해주길 바란다. 남자는 숨을 참고 깊이 잠길 준비를 한다. 그러나 녹음에 숨는 법은 알아도 물속에서 오랫동안 숨을 참는 법은 모른다. 남자는 자신이 이기지 못하리란 사실을 안다. 거대한 것에 저항하는 법을 모른다.

무겁죠.”

조금만 더 참아요.”

까짓 거 해보죠.”

남자는 숨죽여 웃는 여자 위로 제 망토를 덮는다. 여자가 바람새는 소리를 내며 웃을 때마다 그녀의 허리를 조금씩 끌어안는다. 여자는 덫에 걸린 사슴처럼, 남자에게 얌전히 머리를 기댄다. 이 때마저 남자는 조금 두렵다. 여자에게 기댈 때마다 연약한 것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아주 연약한 것이 되는 기분이. 그래서 여자를 조금 더 끌어안고, 그녀의 머리칼에 뺨을 기댄다. 여자는 노래 같은 것을 흥얼거린다. 남자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상한 곡조가 어쩐지 친근하게 느껴진다. 이런 식이다. 매번 이런 식으로 스며든다. 파도가 얼마나 몸집을 부풀렸는지 남자는 모른다. 영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덮을지, 얼마나 밀려올지 모른다. 그래서 종종 바닷가에서 태어났더라면, 하고 생각한다. 그러면 파도가 휩쓴 바닷가가 어떻게 되는지 정도는 알았겠지 싶어서. 혹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물속이 두렵진 않았겠지 싶어서.

난 바다 너머에서 왔어요.

과거의 여자가 말한다. 남자는 속으로 대답한다. 알아요. 나는 파도에요. 여자가 한 적 없는 말을 한다. 그것도 알아요. 당신을 집어삼킬 거에요. 남자는 눈을 감는다. 여자의 흥얼거림에 뒤섞여 파도 소리가 들린다.

파도가 떠나간 뒤 무엇이 쓸려나가고 무엇이 남아있을지, 그는 영영 알고싶지 않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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