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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E

[Fate] 달려라 메리 고 라운드

메이포플러 2019.06.16 21:20

190616 로빈 후드 드림



* BGM

* 이입드림. 드림주 이름X

* 꿈과 희망과 사랑의 놀이공원 데이트



눈을 떠보면, 놀이공원에 있었다.

……?

뭐야, 터널 끝에 설국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익숙한 천장의 아류 같은 라노벨 도입부 전개 싫어요.


달려라 메리 고 라운드


볼을 꼬집어본다. 손에 상당한 힘을 넣어서 세게. 아픈 건 싫지만 꿈이면 깨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안 아파.”

황망해져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흘러나온다. 아프지 않다. 하나도. 조금도. 요만큼도.

무언가를 꼬집는다는 감촉과 볼이 손가락 사이에서 눌리는 느낌은 있지만 아픔은 없다. 기억도 못하는 사이 통각을 잃었을리는 없으니, 이건 꿈이다.

놀이공원에 있는 꿈. 입구도 아니고, 매표소의 앞도 아니고, 놀이공원 한 가운데에 있는 꿈. 이렇게나 말짱한 사고로, 이렇게나 또렷한 정신으로, 놀이기구를 타는 중도 아니고, 축제의 날을 즐기는 떠들썩한 군중들 사이에 덩그러니 홀로 선 채.

내 무의식이지만…… 뭘 어쩌고 싶은 걸까……?

자각하지 못했지만 놀이공원에 가고 싶었던 걸까? 하기사 가본 적이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5, 6……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됐을지도 모른다. 그렇담 한 번 가볼 때가 되기도 했다. '오랜만에 뭐뭐라도 해볼까~’같은, 일탈의 편린 같은 느낌으로.

그렇지만 막상 놀이공원에 가서도 제대로 즐긴 기억이 없는 사람으로서 이런 꿈을 꾼다는 건 조금 의아하다. 놀이기구가 아무리 많아도 탈 수 있는 종류가 얼마 없어 그렇게 즐겁진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좋아하는 건 기껏해야 기념품점이나 물이 흐르는 환경에서 즐기는 라이드 계열 몇 개뿐이었다. 사파리는 좋았지. 그러고보니 간식 사먹는 것도 그럭저럭 좋아했고. 바이킹도 재밌는데. 그리고…… …….

생각해보면 나는 막상 가면 그럭저럭 잘 노는 타입이었다.

정말 놀이공원 갈 때가 된 건가? 생애 최초의 루시드 드림을 즐기면 되는 건가?

주변의 사람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옆을 지나간다. 양떼 사이에 끼어든 늑대처럼 원형의 거리감이 나와 그들(?) 사이에 있지만 그들은 신경쓰는 눈치가 아니다. 아예 내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게다가 이유는 모르겠으나 나도 군중들의 얼굴이 잘 인식되지 않는다. 영화에 나오는 엑스트라처럼 존재감 없이 그 자리에 존재만 하는 듯이. 그게 역할의 전부라는 듯이.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을 빤히 바라봐도 눈을 깜빡이면 어떻게 생겼는지 바로 잊어버리기를 벌써 몇 번이나 반복했다.

솔직히 무섭다. 왜냐하면 이건 꿈이잖아? 내 꿈이고, 심지어 각성몽이고, 배경은 놀이공원에 어째선지 사람이 많고(놀이공원인이까 많은 게 당연하겠지만) 얼굴 인식 기능은 고장났다.

여기서 실수라도 이건 꿈이야라고 한마디 잘못 꺼내기만 하면 지나가던 사람들 모두가 나에게 시선 고정을 한다는 패턴이지 않나? 희번뜩한 눈초리로? 불순물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아니…… 정말…… 싫다……. 꿈이라면 깨어나고 싶다…… 아니 꿈이니까 깨어나고 싶어……. 아무도 즐거워하지 않는 꿈의 수요가 대체 어디에 있냐고 아무나 붙잡고 묻고싶다. 적어도 난 수요자가 아닌데 강제로 공급받고 있잖아. 뭐지? 피할 수 없으면 즐겨요 삶의 체험의 현장? 필요없어.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에 놓이면 일단 도망치고 싶어하는 타입이라고, 나는. 토끼처럼 조심스럽게 대해줬으면 한단 말이지.

일단…… 지도…….”

분명 자는 중인데도 아픈 것 같은 머리를 문지르며 웅얼거린다. 이 영문 모를 상황을 즐기든 어디론가로 피신하든 현재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게 첫 번째 순서다. 사람은 주제파악을 해야한다는 맥락과 동일하다.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어디로 갈지 정할 수 있다. 어느 경우에나 적용되는 말이라고 생각하니까 이번에도 적용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 먹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길을 잃었다.

이게 말이 돼요?

벤치에 걸터앉아서 머리를 싸맨다. 아니 이게 말이 되나? 내 꿈이면 나한테 좀 상냥해야 하지 않나 싶다. 원하는 거 있으면 뿅 나타난다든가, 지도를 원하면 팜플렛이 나타난다든가, 하다못해 길안내 역할이라도 나타난다든가. 보통 루시드 드림이 제공하는 만능 서비스 같은 거 있잖아? 왜 나한테는 없어? 트위터리안의 고질병이 여기서 발병한다. 트위터에 쓰고싶다. 나 길 잃음. 그런데 핸드폰조차 없다.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잖아? 자괴감 들고 괴로워…….

그렇다고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길을 물어보긴 꺼려진다. 애초에 사람인지 뭔지도 모르겠고, 제대로 대답을 해줄지도 모르겠고, 뭔가 비인간적인 반응을 하지 않을까 싶어 무섭고…….

이렇게 된 이상 놀이기구를 즐길 수 밖에 없나 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건 또 그거대로 무섭다. 현실에서는 도전할 수 없는 놀이기구를 탔다가 그 원리를 모르는 내 무의식이 좌석 채로 날 날려보내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아니, 보통 있는 패턴이잖아. 꿈은 자신의 지식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니까, 꿈인지 아닌지 알려면 책을 꺼내 읽어보거나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찔러보면 된다는 얘기처럼 이곳의 놀이기구도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싶다. 어떤 원리인지 모르니까 타면 원심분리기처럼 돌아가다가 결국 나사 하나가 빠진 채 날아가버리는 거지.

…….

내가 귀찮은 성격이라는 걸 여기서 이렇게 또 한번 증명을 한다. 꿈인데도 피곤해……. 왜 내 꿈 안에서 이렇게 피곤해야 하는 거지. 일어나면 분명 피곤할 거야, 싫다……. 이런 꿈이라면 차라리 안 꾸는 게…….

무슨 문제 있어요, 아가씨?”

……?”

안 꾸는 게…….

몸 상태가 안 좋아요? 어지럽다든가.”

웃음과 함께 손이 내밀어진다. 당혹하는 와중에도 손끝의 지문이 뚜렷히 보일 정도의 현실감이 눈앞으로 들이밀어진다. 말도 안 돼.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지는 동시에 근거 없는 확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건 꿈이야. 꿈이니까 가능한 거야. 꿈이니까 이 사람이, 당신이, 내가, 우리가, 여기 있는 거야. 이렇게 마주볼 수 있는 거야.

말만 해요, 오월 아가씨. 당신을 도우러 왔으니까.”

나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꿈속에서도 눈물은 나온다.

신이시여, 꿈이라면 깨어나지 않게 해주세요.

 

 

🌠   🌺   🎠   ✨   💖

 

 

좀 진정 됐어요?”

대답 없이 코만 훌쩍인다. 그가 쓴웃음을 내보이며 손에 쥐어준 손수건은 내 눈물로 축축하게 젖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울음을 왈칵 터뜨려버린 건 그에게도 나에게도 당황스러운 사건이었으나 조건반사 같은 거니까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실제로도 이해심 있는 그는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옆에서 기다려주고 있다. 옆자리에 앉지 않고 서있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옷차림새는 왜 또 이리 귀여운지 모르겠지만.

묻고 싶은 것도 많고 말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기에 혓바닥 아래에 도사린 수많은 단어를 고심해서 고른다. 사람은 한정된 기회의 앞에서 신중해진다.

여기서 뭐 해요?”

아까 말한대로 당신을 도우러 왔죠.”

노래하듯 읊는 말투의 높낮이가 새의 날개처럼 오르내린다. 무게를 덜어내고 덜어내 가볍게 만든 단어의 나열이다. 나는 그가 무슨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시선을 맞춰주지 않는 그의 눈동자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원래는 미아 안내를 지정받았지만, 공교롭게도 이곳에 길 잃은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는지라.”

그러니까 즉슨, 그는 내 담당이라는 뜻이다.

따지자면 전용 스탭이라는 셈이려나.”

확답까지 받아버렸다. 굳이 어미에서 생략한 말이 내 발밑으로 똑 떨어진다. 당신의. 나의. 나만의.

나랑 같이 놀 거야?”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듣긴 한 겁니까? 나는 미아 담당. 직원. 서비스 하는 쪽. 댁은 손님. 서비스 받는 쪽. 그러니까 같이 놀면 안 된다 이 말이죠. 내가 불벼락을 맞아버린다니까.”

놀이기구 좋아해?”

댁 진짜 사람 말을 안 듣는구만.”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그제야 다시 시선이 마주치고, 나는 갈비뼈 안의 심장이 존재함을 어느 때보다 강하게 느낀다. 어찌할 바를 몰라 손수건만 세게 움켜쥔다.

그는 조금 웃는 낯이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새어드는 듯한, 희미한 웃음이다.

이렇게 가만히 있지 말고 지금 당장이라도 직무 수행을 해야하지만…… 잠깐이라면 괜찮겠죠.”

그럼 앉아서 얘기나 할까.”

계속 서있는 그가 신경쓰이던 나는 내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린다.

그건 봐주십쇼. 적어도 직원과 손님의 위치 구별 정도는 해야죠.”

서번트 업계인지 놀이공원 방침인지는 몰라도 빡빡하네…….”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요.”

그리곤 잠시 말이 끊긴다. 소란스러운 놀이공원 안에 벤치 하나 만큼의 적막한 공간이 만들어진다. 나는 어색함을 느낄 새도 없이 주어진 순간을 음미한다.

안 가봐도 되겠어요?”

어딜?”

놀이공원에 왔으니 놀이기구를 탄다든가, 아니면 퍼레이드를 보러 간다든가, 다른 구경거리라든가 많잖아요. 오랜만에 온 모양이니 즐기면 좋잖아. 맛있는 걸 먹는다거나.”

미아 담당이라고 말한 주제에 직원으로서의 의무는 대충이나마 하려는 모양이다. PR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지만 그건 그거대로 재밌다. 어디 가고 싶다고 말하면 길 안내를 해주는 걸까? 옆에 딱 달라붙어 이건 뭐고 저건 뭐고 설명하는 인간 네비게이션인가. 귀엽다.

그래도 대답은 이미 정해져있다.

…… 네 옆에 있을래.”

난 보여줄 게 없는데요?”

그래도 여기 있을래.”

댁한테 줄만한 것도 없고.”

괜찮아.”

댁도 참 특이한 사람이라니까.”

그런가.”

그런 당신이니까, 이 정도는 해야겠지.”

그리 말한 로빈이 내 앞으로 몸을 숙인다. 그의 말끔한 얼굴이 가까워진다. 무슨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의 손은 이미 내 귓가 언저리에 도달해 있다. 적막에게 올라타는 머리카락 스치는 소리.

.”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는 시늉을 한 그는 눈앞에 무언가를 들이댄다. 끄트머리가 무딘 손가락 사이에서 조그마한 물체가 반짝거린다. 갑자기 내 머리칼 사이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구는 물체의 등장에 눈이 저절로 동그래진다.

난 이걸 안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지만.

이거 그거잖아.”

그거.”

갖고 있었어?”

아니~? 정확히는 댁이 갖고 있었지.”

내가?”

댁한테 줬으니까, 그걸 어떻게 다루든 그건 당신 마음이라고 내가 그랬잖아.”

그랬지…….”

실제로 가진 적은 없으니 대답이 애매모호해진다. 그는 파란새가 새겨진 은주화를 주며 팔아버리든 어쩌든 마음대로 하라고 했으나, 내 손바닥 위에 있어야 어떻게 해볼 수 있지 않은가. 물론 팔아버릴 일은 결코 없었을 테지만. 오히려 부적처럼 잘만 가지고 다녔을 테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그렇구나…….”

내가 갖고 있었구나.

눈앞의 동전으로 손을 뻗는다. 그가 내게 선물한, 가진 적 없는 내 동전.

그의 손과 함께 동전을 잡으려는 찰나, 나에게 자랑하듯 들고 있던 은빛 파랑새가 그의 손가락 사이로 모습을 감춘다.

어이쿠, 안 되지.”

? ? 뭐야? 뭐에요, 내 동전 돌려줘요.”

주먹을 움켜쥐고 넉살 좋게 말하는 로빈에게 당황해서 쏘아댄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손가락들을 까딱거리며 그 위에서 동전을 굴린다. 이상한 데에서 재주가 좋은 남자라고 다시 한번 감탄한다. 손 쓰는 거 하나는 어디에서 빠지지 않는다.

애한테 사탕 뺏어가는 거 같아서 좀 그렇지만, 이젠 필요 없으니까.”

애라느니 사탕이라느니 자존심 상할 만한 단어들이 대거 튀어나왔지만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게 있다.

이젠 필요 없다니 그게 무슨.”

그러니까, 이렇게 한다는 소리지.”

손등 위에서 굴러다니던 동전을 움켜쥐더니, 주먹을 다시 펴니까 동전은 온데간데 없고 웬 꽃 한송이가 놓여 있다. 연분홍색의 수채화 그림 같은, 탐스럽게 피어난 꽃이다. 뭐야, 진짜 내 동전 돌려줘요. 줬다가 뺐는 게 어딨어. 아직 제대로 가진 적도 없는데!

말문이 막혀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있는 내게 로빈은 동전과 등가교환을 한 꽃송이를 내 머리칼 사이에 꽂는다. 아니 이건 또 뭐하는 짓이야. 입을 열면 사람 말이 되지 못한 말이나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더욱 꾹 다문다. 로빈의 얼굴, 그것도 초근접거리에 면역이 없고 이런 이벤트를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얼음처럼 굳어있는 게 고작이다. 이 꽃과 그 꽃 같은 얼굴로 날 회유하려는 거지? 그런 거지?

, 나름 잘 어울리는 거 아뇨?”

진짜 이게 무슨 플레이지.”

아가씨 대접은 별로 마음에 차지 않았나보죠, 아가씨?”

얼굴을 묻고 소리 지를 베개가 절실해지는 수면시간이다. 마음 먹고 수작질 부리는 로빈 후드는 너무 버거운 상대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강인한 악력으로 움켜쥐고 있는 손수건이 나중에 소금 냄새가 나는 주름 투성이 천이 되어도 나는 모르는 일이다. 이건 온전히 로빈에게 잘못이 있으며 그의 자업자득이니까. 그치만 눈 뜨고 동전 잃은 데다가 맨정신으로 수치플레이 당한 나는 뭘 잘못했죠?

슬쩍 로빈을 곁눈질 한다. 문득 눈이 마주치고, 시선이 맞자마자 로빈이 가볍게 미소짓는다.

내가 잘못했네.

. 슬슬 시작하나보네.”

왜 말 돌리는 거야, 이번엔 뭔데.”

대뜸 뜬금없는 말을 하는 그에게 묻자 로빈이 내 어깨를 팔로 끌어안는다. 뭐지? 갑자기 그의 배에 뺨을 부비게 된 마스터의 심정이 어떨지 서술하시오. 아아니 진짜 이게 뭐지? 아까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저기 저쪽. 보여요?”

얼떨떨해 하면서도 로빈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끝을 시선으로 쫓는다. 멀리 떨어진 동화 속 마을을 표방한 거리의 가장 끝에서 뭔가가 움직인다.

2층 높이의 조형물들이 느릿한 속도로 길 위를 지나간다. 탑이 있고, 성이 있고, 그 주위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이들이 있다. 관람객들이 길가에 몰려들어 노랫소리와 환호성이 빈자리를 메운다.

퍼레이드구나.”

그렇지. 댁은 갈 생각은…….”

말끝을 흐리며 내 안색을 살핀다. 나는 뭘 물어보냐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본다.

없는 거 같고. 어차피 이쪽을 지나갈 테니까 느긋하게 기다리도록 할까요.”

한참 걸리겠네.”

정신 차리면 순식간이죠. 좋은 것들은 대부분 그렇다니까.”

이번엔 내가 그의 안색을 살핀다. 짧게 발해진 말에는 확신이 있다. 단어의 무게를 덜어내지 않을 때, 로빈의 입을 통해 나오는 그의 삶은 납으로 만든 추처럼 갑자기 내 어깨와 가슴을 짓누를 때가 있다. 그의 인생에 행복만 있길 바라는데, 그의 인생은 이미 한참 전에 끝났다. 너무 일찍 끝나버렸다.

지나간 시간에 무언가를 얹는 방법을 나는 모른다. 그래서 남겨진 순간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려고 시도한다.

여기 앉아서 기다릴래?”

그러면 내가 혼난다니까요.”

같이 혼나줄게.”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웃는다. 나는 퍼레이드를 바라봐야 하니까, 언제 이곳에 도달할지 보고 있어야 하니까 그를 쳐다보지 않는다.

괜찮아요.”

정말?”

괜찮을 거에요.”

운 건 난데 정작 바다 냄새를 풍기는 건 그의 목소리다. 눈물이 나올 순간에 울지 못하는 이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생각해본다. 눈앞을 가리는 휘장과 베일이 얼마나 많았을지, 그것을 어떻게 걷어내며 여기까지 걸어왔을지.

봐요, 벌써 코앞까지 왔잖아.”

그의 말대로다. 방금 전까지 저 먼 곳에 있던 행렬이 어느새 근처에 도달해있다.

유럽의 전통 복식으로 보이는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웃는 얼굴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 알지 못하지만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 음색이 화음을 자아낸다. 가장 앞에 선 이들이 꽃바구니에 가득 담긴 꽃송이들을 지나가는 길마다 뿌리고 뒤따르는 사람들이 사방으로 인사와 미소를 날린다. 종아리 언저리에서 가지런히 살랑이는 흰 치맛자락과 상의를 가득 수놓은 꽃의 형상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구릿빛 머리칼과 금빛 머리칼이 한데 섞여 태양 아래에서 반짝거리고 그 뒤로 새파란 하늘에 꽃비가 떨어진다.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언젠간 찾아올 끄트머리를 기다린다. 모든 것은 끝나기 마련이므로. 어린아이만큼 작은 남자들이 성인보다 커다란 금관 악기를 끌어안고 연주한다. 형형색색의 깃발을 높이 든 기수들이 지나가고, 그 뒤를 중세 귀부인의 복식을 차려입은 우아한 여인들을 태운 말들이 따른다. 화환으로 장식한 말들은 고개를 늘어뜨리고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우아한 여인들의 신발 앞코를 가득 메운 휘황한 보석들이 치맛자락 사이로 간간히 보인다. 나는 하늘하늘 나비날개처럼 흔들리는 베일 끝을 마지막 신기루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응시한다.

나는 왜 여기에 있을까…….”

가슴에서 떠오른 말이 머리로 가던 도중에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말 그대로 꿈속의 세상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나와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의 사이에 놓인 거리를 실감하게 한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다. 세상과 나는 투명하게 유리되어 있다.

글쎄, 날 보러 온 건가.”

이 남자는 자신의 무게뿐만 아니라 남의 짐을 줄이는 것도 썩 잘 한다.

……그런가. 그런가봐.”

하기야 이 모든 것의 시작은 그에게서 비롯되었다. 멸망하는 세계를 구하는 것보다 먼저 그의 존재가 있었다. 한참 전에 흙으로 돌아가버린 남자를 만나기 위해 불타오르는 구덩이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

사실 이런 묘사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 앞에서 얄팍하기 그지 없는 것이다. 그와 나는 서있는 위치가 다르다. 나는 가볍게 선택하고, 가볍게 행한다. 그에게 빚진 것은 없고, 얽매여있지도 않다. 오로지 내 선택에 달려있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살아남은 세상은 이렇게 우주를 유영하게 되었다.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난다. 나는 얼어붙은 우주선의 선장으로서의 책임을 방치하고 외면했다. 그런 것이다. 그만큼인 것이다.

마음껏 즐겼습니까?”

그런 거 같아.”

그럼 돌아갈 시간이군.”

그의 나지막한 말의 밑바닥을 읽어낸다. 가장 밑바닥이라 빛이 닿지 않는데도 선연하다. 나는 혹시 하는 마음에 그를 바라본다. 로빈은 말 없이 날 바라본다. 깨달음은 잎가지를 문 비둘기처럼 곧바로 날아와 가슴팍에 꽂힌다. 직감은 화살같은 것이라 생각보다 앞서 심장에 도달한다. 그래서 직감이라고 부른다.

너 날 보낼 셈이구나.”

행렬과 축제가 끝난 뒤 적막이 남겨진 자리에서, 조용한 이별이 준비된다. 나는 입을 다문다. 만남과 이별은 언제나 나에게 달린 것이었고, 마지막으로 고한 이별 또한 내 선택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이번에야말로 그가 나에게 선고할 자격이 있으므로.

발언권은 넘겨졌다.

좋은 꿈이었나요?”

그는 웃는 것 같은데, 그닥 웃는 낯 같지 않다. 이이는 영령인 주제에 표정 관리는 더럽게 못하기 때문에 매번 후드를 쓰고 다니는 거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리가 없다.

좋은 꿈을 꿨으면 그만 잠에서 깨어나요. 뭐어 그게 좋은 꿈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꿈은 고작 꿈일 뿐이잖아요. 이따위 것들은 눈을 뜨고 일어나서, 그런 일도 있었지~ 하고 한번 뒤돌아보는 선에서 그치는 삶을 보내라고요. 당신한테는 이런 걸 신경쓸 새도 없을 만큼 바빠질 시간들이 한참 남아있으니까.”

미아 담당은 꿈에서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일하는 모양이네.”

이게 최선이야.”

…….”

댁은 열심히 했어. 등 뒤까지 쫓아온, 죽음이란 백발백중의 사냥꾼을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 이것만 해도 대단한 업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할만큼 한 사람이 그만둔다고 해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다고요, 나는.”

── 내 꿈속이 아니라 현실에서 들은 말이라면 더 좋을뻔 했는데 말이지.”

그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좀 어려운 요청이구만. 할 수만 있다면…… 아니, 이건 못 들은 걸로 해요.”

.”

끝을 받아들여요, 마스터. 이게 당신이 칼데아의 마스터로서 보내는 마지막 순간이야.”

그러네.”

이 즈음에서 내 옆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서있는 남자의 정체에 대해 고찰해볼 때가 된 것 같다. 이게 내가 원하는 로빈이라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고 있는 건지. 혹은 진짜 만에 하나의 확률로 나타난 로빈인지.

전자면 내 양심이 아예 제 기능을 못하는 것이고 후자면 내 죄가 크다. 후자일 경우는 세상 그냥 멸망하라고 던져놓고 도주한 마스터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찾아온 애정 깊은 서번트가 아닌가. 전자든 후자든 심장이 아프기 그지 없다.

아니 그치만? 나는 세계를 구해놨는데 세계가 날 버렸는데? 어쩌면 좋죠? 답은 세계를 버리고 탈출하는 것이다. 그렇게 탈출한 나는 죄가 없지만 로빈을 거기에 두고 온 죄가 조금 많이 크다. 다 인간들이 잘못한 거다. 서번트들은 잘못이 없어요.

……사실 말은 고찰이라고 했어도 딱히 생각할 거리는 없다. 왜냐하면 난 이미 결심을 한 상태이고, 이왕 버린 양심 계속 버린채로 살기로 했으니까. 사랑 앞에 서면 혈육 얼굴도 못 알아볼만큼 앞뒤 없는 태도로 사랑을 하기로 했다 이 말이다.

로빈.”

듣고 있어요.”

세상은 넓고 사람은 다 죽어.”

그야 그렇…… ?”

내 남자는 놀라는 얼굴도 잘생겼다.

그러면 세상이 망할 때까지 사랑 좀 해도 별 문제 없잖아. 내 사랑이 세상을 망하게 하는 것도 아닌데.”

? 아니, ?”

아무리 꿈에서 깨어나라고 해도, 내가 현실도피를 하며 차원연하를 사랑하는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이건 어쩔 수 없는 거고.”

이 인간은 중세남이라 나이차가 좀 애매해지지만 그건 차치해두자.

사실 칼데아 탈주하면서 로빈도 정리하려고 하긴 했는데 말야.”

…….”

로빈이 얼굴을 찌푸리며 못내 괴롭다는 표정을 짓는다. 뭔가 잘못한 기분이 든다. 아니? 잘못하긴 했지만?

실패해버렸거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지만 가장 큰 오산은 처음엔 분명 이렇게까지 사랑할 생각은 없었다는 거 아닐까…….”

그래서 정신을 차려보면 조금씩 망한 사랑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인생을 구원한다. 그렇게 살아간다.

그냥 조금만 마음을 주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까 헐값에 다 팔아 넘겨버린 거지. 그런데도 계속 좋아하는 마음이 솟아나서, 이게 대체 어디서 오는 건지 궁금해지는 거야. 근데 그게 그렇게 중요할까?”

내 애정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건지, 언제까지 지속되는 건지 신경쓸 필요가 있을까?

인생은 짧고, 네 말대로 좋은 순간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리는데 그 순간을 즐기지 않으면 손해가 아닐까? 나중에 후회가 되어 돌아오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억울하지 않아? 최선이라고 생각해 하지 않은 선택을 몇 십년 뒤에 곱씹으며 후회하는 건?”

가망 없는 싹은 일찌감치 잘라버리는 게 나아요. 길게 끌어봤자 질척거리고 더러운 꼴을 볼 뿐이라고요.”

내뱉듯한 말투다. 기분이 그리 평안하지 않아보여 주눅들지만 이 화제에 관해서는 밀고 나가기로 결정했다. 나는 양심도 없고 애비도 없고 야마도 없다. 지금부터 그렇게 정했다.

사람은 원래 다 더러워. 그러니까 사는 꼴도 더럽지.”

모 궁정음악가가 비슷한 말을 한 것 같으니까 그에게서 얻은 교훈이라고 대충 둘러대자. 불만접수는 프랑스 출신 in 영령의 좌로 1577…….

내 생각에 로빈이 나에게 할만한 말은 왜 자기를 내버려두고 가버렸냐는 거였는데…… 지금 하는 말은 날 잊고 잘 살아요인 걸 보면 역시 내 꿈속의 로빈인가.”

……이게 맞는 거야. 한참 전에 죽은 사람하고 산 사람은 애초에 만나지 않는 게 순리라고.”

! 그 말 로빈이 할 거 같긴 해. 더 모르겠네.”

이제라도 바로잡으려는 거야. 그런데 그냥 이렇게 있겠다고? 그냥 이렇게, 이렇게…….”

널 사랑하는 채로 있을 거냐고?”

내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상대방 의사를 무시하는 타입은 아닌데 이 인간이 땅 파는 꼴을 보고 있자면 숨막혀 죽을 만큼 사랑을 퍼부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마음은 든다.

평범한 일상 좋지. 밥 먹고 일하고 놀고 떠들고 웃고 마시고 잠들고 다시 눈을 뜨는 삶 좋지. 그런데 반복되는 삶이 있으니까 이런 놀이공원이 색다르고 재밌는 거 아냐? 사실 이미 반쯤 일상이 된 것 같지만, 놀이공원 상태를 즐기는 것도 좋잖아. 적절한 사랑을 하면 삶에 생기가 돈다니까.”

평범한 일상에 적절한 사랑이 더해지면 뭐가 되는지 아는가. 회전목마가 되는 것이다. 예쁘장한 생김새에 귀여운 곡조를 흘리며 꿈결처럼 제자리를 도는 회전목마가. 그건 보기에도 좋고 정신없이 달리는 다른 놀이기구들과는 달리 타기에도 안정적일 터다.

내 칼데아가 그런 회전목마였다고 생각한다. 주어진 자리에서 주어진 역할을 하며 주어진 순서에 따라 나아가고 반복하는 회전목마. 예쁘고 사랑스럽고 계속 바라보고 싶은 회전목마.

칼데아를 떠난 지금은, 회전목마의 축에 매인 망아지 중 하나가 고삐를 풀고 뛰쳐나온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이제야 네 다리로 땅을 단단히 딛고 선 말 위에 앉은 기분이다. 풀려난 말 위에서 곰곰이 생각하는 거다.

이제 어디로 가볼까?

물론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 있을지 장담은 못 하지. 모든 건 끝이 있기 마련인데 나라고 안 그러겠어.”

어느 순간 마음이 식을 수도 있고, 다른 형태로 변하거나, 전에 하지 못한 정리를 기어이 할 수도 있다. 그야 이건 고작해야 꿈이고, 현실에서 계속 꿈을 꾸긴 어려우니까. 그의 말대로 나는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만 그 마음이 지금과 달라질 걸 걱정하고 두려워하다 아예 그만두고 싶지는 않다. 사랑하지 않아서 후회하기보단 좀 더 사랑할 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쪽이 나으니까. 그 편이 결단코 나으니까.

그치만 일단 좀 더 사랑해보기로 했어. 나도 내 마음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좀 더 사랑하기로. 아직 끝이 아니야, 로빈. 설령 끝이 났다고 해도 이젠 새로운 시작이라고.”

최대한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말을 맺는다. 안 해도 될 말까지 할 말 못할 말 다 한거 같은데,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버스는 떠났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로빈은 황망하다는 듯이, 그리고 어딘가가 무너져내린 듯이 날 바라보다 제 얼굴을 손으로 문지른다.

……진짜 막무가내라고요.”

좀 그렇지.”

말도 안 된다니까…….”

사랑이 좀 그렇고.”

당신이 말도 안 돼.”

너도 그래, 자기.”

──…….”

로빈은 기어이 주저앉는다. 언제 꼿꼿이 서있었냐는 양 제자리에 쭈그려앉아서 마른 세수만 연신 해댄다. 나는 입이 터진대로 다 쏟아냈기 때문에 처진 어깨에 얹을 말이 없다. 내가 지금까지 한 말은 로빈 네 기분이 어떻든 난 널 사랑할 거니까 상관 말고 가만히 내 사랑이나 받아라를 길게 풀어놓은 것에 불과한 탓이다. 그런 와중에 로빈의 등을 껴안고 보듬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솟아오르니, 인간은 양심을 이렇게까지 버릴 수가 있구나 싶다.

없는 양심으로 생각해보면 로빈이 내 심장을 조져놨으니 나도 얠 좀 조져도 괜찮겠지 하는 생각도 좀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서로 공평하게 서로의 인생을 망치자. 상대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그 바람이 이루어진 자리에 내가 있을 거란 이기적이고 오만한 사랑으로 조지는 건 무척이나 온건한 처사이지 않은가?

손수건 빌려줄까?”

울긴 누가 운다고.”

당신은 좀 울 필요가 있어.”

댁 때문에 울 일은 없을 걸요.”

어디 두고봅시다.”

한손에 그에게 받은 손수건을 꽉 쥔 채, 다른 한손으로 그의 등을 도닥인다. 때때로 이리도 작아지는 등을 나는 사랑하는 것이다. 어깨에 짊어진 것을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내쉴 때의 등을.

다음에는 당신 눈물을 닦게 해줘.”

……다 큰 남자가 우는 꼴이 그렇게나 보고싶어요?”

너니까 그렇지.”

나참…… 뜻대로 하시지요.”

다음을 기약하는 말은 가볍게 주고받아진다. 가볍게. 풍선보다 가볍게. 솜사탕보다 달콤하게. 이런 식으로 앞으로의 인생에 설탕을 조금씩 뿌린다. 맛있는 식사가 되길. 멋진 인생이 되길.

로빈은 대충 진정했는지 자신의 어깨 위에 얹어진 내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쳐올린다. 세 번째로 눈이 마주치고, 기다렸다는 듯이 만들어지는 잘생긴 웃는 얼굴.

안녕히, 오월 아가씨. 나가는 문은 저쪽입니다.”

그렇게 나는 놀이공원에서 내쫓겨났다.

으아아악 얼굴보구…….”

눈을 뜨자마자 하는 말이라 하기엔 참으로 이상한 것이었다. 아니나다를까 피곤을 동반한 기상에 눈만 깜빡인다. 오늘이 주말이라 망정이지 평일이었으면 걸어다니는 시체꼴이었을 터다.

나는 눈에 익은 벽지를 무심히 응시하며 방금 전까지 꾼 꿈을 천천히 곱씹어보았다. 과몰입 오타쿠인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오늘의 무의식은 정말로 진정성의 액기스였다. 어디 딴 데 가서 할 얘기는 아니다.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지.

찬찬히 오늘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한다. 매주 반복하는 일상을 정리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놀이공원에나 갈까.”

오늘은 힘들고, 다음주 주말 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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